정두언 Story - 큰아버지 정성태, 내 인생의 큰 그림자


내 일생에 영향을 준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분을 꼽으라고 하면 큰아버지 정성태 선생을 들겠다. 정성태 선생을 소개하기 위해 먼저 1968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의 ‘새 의자’ 난에 실린 그 분의 프로필을 보자.

신민 정성태 원내총무

“새로 신민당 원내총무 자리를 맡은 정성태의원은 5선의 관록을 지닌 말없는 투사형 정치인. 정씨가 정당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해방이 되던 해 30세 때, 보전의 스승이었던 장덕수씨의 권유로 한국민주당에 입당한 때부터. 정씨는 그 후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전남 화순탄광에 처음으로 노조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때 안면을 익힌 전진한씨가 초대 사회부장관으로 취임함에 따라 사회부 감사과장에 발탁됐고, 49년 내무부 인사과장으로 전보, 50년 이 자리를 사임하고 고향인 광주에서 2대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 그 후 광주상고 교장으로 있다가 3대 때 당선되어 4, 5, 6, 7대에 계속 당선. 그는 6대 국회 때 한일 협정 비준 파동을 계기로 의원직을 사퇴, 강경한 신한계로 지칭됐지만, 계보보다 당수중심으로 일해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 따라 지금은 유진오총재 직계로 통한다. 가족은 73세의 노모와 부인 최봉진여사 사이에 4남 2녀. 취미는 골프. 54세.”

위 프로필을 좀 더 보완하면, 정선생은 1915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하동 정씨다. 고창고보를 나와서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 법학과를 졸업했다. 장덕수, 김도연, 윤보선, 유진오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로서 김영삼 전대통령보다는 서열이 하나 앞선 그룹에 속한다. 자유당과 공화당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입건, 구속, 징계, 의원직 사퇴 등을 거듭하는 투사형이나, 성품이 원만하여 3차례의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내고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했다.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여 광주에서 서울까지 걷는 천리도보로 유명하며, 6선을 끝으로 한창 나이에 정계를 은퇴하여 그 후 군사독재정권의 총리 또는 당대표 제의등 잦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킨 그야말로 청렴결백한 정치인이다. 2000년 8월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는데, 은퇴 후 돌아가실 때 까지 30년 동안 마지막 선거 빚을 매월 10만원씩 갚은  일화도 있다. 당시 나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모시고 빈소를 가면서 우스개 삼아 이 말을 했더니 이총재 왈, ‘빚을 갚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다 대단하네요. 어쨌든 정성태 선생 같은 정치인은 이 땅에서 다시 보기 힘들겁니다.’라고 했다. 

사실 정성태 선생은 엄격히 말해서 나의 친 큰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친 큰아버지 이상으로 여기며 살았다. 6.25전쟁이 나던 해 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는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무일푼에 백수였다. 그래서 장가들자마자 처가살이를 했다. 전쟁 통에 그럭저럭  처갓집에 얹혀 지내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처가살이를 계속할 명분이 없어졌다. 고심 끝에 부모님은 무작정 상경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기댈 언덕은 있었다.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계신 친척 형님이 그 언덕이었다. 사전에 상의나 양해도 없었으리라. 가진 기술이라고는 자동차 운전뿐인 아버지는 잠시 그 형님의 기사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형님 이름으로 찦차를 사서 불법 자가용 영업을 하다가, 또 그것이 말썽이 되자 그 차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당시는 모찌꼬미)해 주고 세를 받아먹으며 살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수입은 집안 살림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던 것 같고 앞서 어머니의 얘기에서 풀은 대로 주로 어머니가 온갖 장사를 해가며 살림을 꾸려갔다. 그렇게 살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그때마다 국회의원하는 큰집이 늘 바람막이와 방패막이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거의 매일 치고받고 벌어지는 부모님의 싸움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치달으면 우리는 큰댁으로 긴급구조를 요청하곤 했었다. 우리가 삼청동 근방을 빙빙돌며 살았던 이유는 바로 그 큰집이 삼청동 국회아파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가 살던 무허가 집이 헐리고 모두가 밖으로 나앉게 되었을 때에도 큰집에서 2층 방 하나를 내주어 우리 식구가 살게 해주었고, 신촌으로 집을 얻어 나갈 때에도 큰댁에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에게 큰 아버지는 늘 긍지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큰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이 늘 든든했고 자랑스러웠다. 더군다나 큰 아버지는 실제로 너무 멋있는 분이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셨으며, 성격도 호방하고 무척 소탈하셨다. 나는 가끔 큰아버지를 얘기하면서 20세기 한반도에서 가장 잘생긴 정치인 세 명을 들라고 하면 여운형, 김일성, 정성태를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큰아버지는 유도, 야구를 비롯해서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목소리가 우람해서 한번 웃으시면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던 것 같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아무하고도 친구처럼 지냈다. 술도 늘 막걸리만 마셨다. 웬만한 호남사람 치고 종로 서린동 골목에서 큰아버지에게 막걸리 한 번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막걸리 한 잔 걸치고 흥얼흥얼 경복궁 돌담길을 걸어 올라오시는 큰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 우리 두언이구나. 너 공부 참 잘한다지? 너는 꼭 큰 사람이 될 거다. 자, 사탕하나 사먹어라." 사실 그때부터 큰아버지는 내 마음 속에 인생의 모델이자 목표로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은 집이면서도 큰 집과 너무 차이가 많았다. 국회의원과 운전수, 여유와 빈곤, 단란과 혼란, 미래에 대한 밝음과 어두움 등등. 더구나 정작 큰집은 그렇지 않은데 그 주변은 우리를 은근히 업신여겼던 것 같다. 운전수 집, 먼 친척, 말썽꾸러기 친척 동생... 하지만 거기서 오는 열등감과 모멸감이 위에서 말한 그 인생의 모델이자 목표를 나의 마음속에 더 강하게 자리잡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큰아버지의 영향은 자랄 때 뿐아니라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또 직간접적으로 내게 미치고 있다. 선거 때도 큰 아버지의 덕을 많이 본다. 한나라당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호남사람들도 ‘자네가 정부의장 조카라며?’ 하고 호의적으로 대해준다. 물론 이제는 대부분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호남지역에 가도 정성태 조카라고 하면 대접이 사뭇 달라진다. 어떤 이들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앞서 얘기한 큰아버지의 여러 가지 이미지와 기억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소중한 일화가 하나 있다.

2000년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큰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사실 지금까지 큰아버지는 내게 너무 큰 존재였지 가까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니 진지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큰아버지는 대뜸 칭찬부터 하셨다. "잘했다. 정씨집안에 용기있는 놈이 없더니 네가 나타났구나. 잘 해봐라." 그러면서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셨다.

“내가 볼 때 이번 선거가 쉽지 않다. 낙선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마라. 나도 처음에 공무원을 그만두고 출마를 했다가 실패를 했지. 그런데 낙선한 경험이 훗날 정치하는데 큰 도움이 되더라. 주변사람부터 잘 챙기고, 언론의 도움을 받도록 노력해라. 그리고 이왕 정치를 하려면 대망을 가져야 한다. 대망을 갖고 안 갖고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그때 돌아오는 길에 나는 좀 의아스러운 게 하나 있었다. 아니, 이제 첫 출마하는 놈한테, 그것도 당선될지도 모르는 놈한테 대망을 가지라니. 이건 좀 어색한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세월이 지나면서 새록새록 그 의미를 깨닫고 있다. 사람이 뜻을 크게 품느냐 작게 품느냐에 따라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기 좋게 낙선을 했다. 어쩌면 나는 큰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나가던 공직을 그만둔 거나, 첫 번째 선거에 낙선한 거나, 돈 없고 빽 없는 거나. 낙선 신고를 하려고 다시 큰아버지를 찾아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평소에 궁금하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큰아버지는 대망을 품지 않으셨나요? 당시 야당 중진들은 다 계보를 거느리고 관리하고 했는데 왜 큰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나요?" 큰아버지로부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난생 처음 듣는 놀라운 사실들이 들어있었다.

1950년에 내무부 인사과장이면 지금의 청와대 인사비서관에 해당하는 잘 나가는 자리다. 그 좋은 자리를 내던지고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한 큰아버지는 훗날 조선대 총장을 지낸 박철웅씨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다시 서울로 올라온 그는 실의에 빠져 있다가 6. 25전쟁을 맞고도 피난을 가지 못한다. 인민군에게 사로잡힌 그는 평양까지 끌려가 인민재판을 받는다. 남조선 고위관리를 지낸 그는 교수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 그때 인민재판장이 보성전문 은사님이었다. 평소에 그를 아낀 은사님은 그를 몰래 빼내 인민군으로 편입시킨다. 인민군 병사로 낙동강까지 내려온 그는 국방군에 투항을 한다. 그리고는 이듬해 광주로 내려가 광주상고 교장에 취임한다. 3년후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된다. 내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다.

“나는 이래서 원죄를 가진 셈이 되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나는 적색분자로서의 경력을 감추고 정치를 해야 했다. 이런 나는 대망을 꿀 수가 없다고, 아니 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게 줄을 서는 사람을 말렸다. 다른 사람에게 가도록 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여순반란 사건의 주모자로 몰렸던 박정희를 생각했다. 박정희와 큰아버지의 차이는 무언가? 결국 권력의지의 차이인가? 아니면 선비정신? 지성의 양심? 물론 사람은 생긴 대로 산다. 하지만 큰아버지도 황혼을 보내면서 일말의 회한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 이런 얘기를 남겨준 것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존경받는 양심의 길과 핏발서는 권력의 길 사이에서 이것저것도 아닌 채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있다가 잊혀져 갈 것인가?

Posted by 정두언